영화 ‘몽타주’에서 유괴범은 자신의 딸에게 필요한 심장 수술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른 집 아이를 납치 한다. 그리고 납치를 통해 얻은 돈으로 딸을 수술시킨다. 딸은 수술을 받아 잘 성장하고 결혼한 후 딸도 낳는다. 유괴범은 손녀까지 보는 호강을 누린다. 그러나 그가 유괴한 다른 집의 딸은 죽었고, 그 엄마(엄정화)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 사적 복수를 감행한다. 

결국 유괴범은 유괴범임이 밝혀진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범죄를 추궁하는 형사 앞에서 밤마다 딸의 고통스런 숨소리를 들을 때의 심정을 당신은 모른다고 말한다. 즉 그는 딸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밖에 없는 부모의 마음을 들어 자신의 행위의 타당함에 대해 항변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의 딸을 위해 범죄의 이유를 든다한들 그것은 정당화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심장 수술이 무료로 이루어진다면 어떨까. 그럼 아마 다른 사람의 딸을 납치하고 그 목숨을 해치고 그렇게 받은 돈으로 자신의 딸을 수술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또한 아예 심장 수술 의료기술이 없다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만약 돈이 있어도 심장 수술을 못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짓을 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돈이 있으면 수술을 받을 수 있는 구조는 이러한 범죄에 대한 충동을 가능하게 한다. 


영화 <몽타주>의 한 장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학은 급속히 발달한다. 발달하는 이유는 바로 그 의학 기술이 수익을 낳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가지고 오는 돈에는 출처, 근원이 없다. 자본주의 의학에서는 돈을 어떻게 마련했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냥 비용만 지불하면 된다. 그 돈이 사람을 죽여 받은 돈이든, 매매춘을 해서 번 돈이든 묻지 않는다. 숫자만 채워오면 문제는 없으며 누구나 혜택을 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한 돈은 모든 인간의 행위를 은폐한다. 

의학 기술을 사회화 한다면, 자식의 병을 고친다는 이유를 들어 아이를 유괴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자본주의에서 유괴는 더욱 심해지는 것인지 모른다. 돈을 벌기 위한 의학기술의 발달은 새로운 의료서비스를 개발하고, 높은 단가의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만약 이러한 기술이 아예 없다면 부모들은 그냥 안 되는 것으로 포기하고 만다. 그렇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스스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도 없는 것이며 외부에서 비난할 계제도 없게 된다. 

하지만 의학 기술이 있다면 부모 된 도리에서 어떻게든 어떤 비용을 치르든 그 치료법을 시도해야 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한 점은 가난한 집의 사람들이면서 자식에 대한 의무감이 많은 이들일 수록 고민에 빠질 것이다. 오로지 각 개인들의 질병은 가족, 그중에서도 부모가 책임져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만약 그 의학기술이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관리되거나 적용이 된다면 수많은 부모들의 죄책감의 고통이나 치욕, 그리고 범죄는 줄어들지도 모른다. 범죄를 통한 의료비용의 조달이 또 나쁜 점은 그 단가의 비싸고 적절하고를 따지지 않고 시장가격을 확증시켜주는데 있다.

각종 영화들은 이러한 근본적인 점에 대한 고민을 뒤로 한다. 의료비용이 얼마이고, 그것을 주인공은 무조건 채우려고 발버둥 친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부모애라는 이름으로 관객들의 연민과 동정을 자극하려 한다. 특히 한국 영화에서는 이렇게 이른바 부성애와 모성애를 과잉화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부성애와 모성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의료기술의 사적 소유를 확장시키고, 의료 단가를 높인다. 부성애와 모성애의 경쟁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떤 가격을 설정해도 찾는 소비군이 형성되기 때문이다. 만약 자식을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하는 부모의 행위를 미담으로 다루는 사회분위기가 없다면, 영화 ‘몽타주’에서 유괴는 없었을지 모른다. 


영화 <나는 아빠다>의 한 장면. 

이는 유괴에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영화 ‘나는 아빠다’에서는 딸아이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장기밀매업자의 살인사건을 은폐하는 형사(김승우)가 등장한다. 영화 이름이 ‘나는 아빠다’라는 것은 부성애를 강조하는 점에 초점이 있다. 영화 ‘마을금고연쇄습격사건’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빠 배기로(이문식)는 딸의 불치병 치료에 필요한 돈 때문에 마을금고를 습격한다. 봉준호 감독의 ‘마더’에 등장하는 엄마도 이러한 범죄 행위들을 할 개연성이 많을 것이다. 영화 ‘돈 크라이 마미’에서 딸의 성폭행을 가한 10대들에게 사적 복수를 감행한 엄마도 마찬가지겠다. 영화 ‘몽타주’의 엄마도 결국 자신과 딸을 위해 범인에게 범법행위를 하고 만다. 

물론 그러한 행위는 모성애와 죄책감이라는 이름으로 동정을 얻는다. 만약 자신의 딸이 심장병을 앓고, 치료에 돈이 필요할 때 영화 ‘몽타주’의 엄마 같은 모성적 태도라면 가능할지 모른다. 그녀는 15년 동안 자기 딸의 수사에만 매달렸고 이는 영화에서 대단한 모성애로 감동을 주는 장치가 된다. 어디 엄마만일까. 영화 ‘7번방의 선물’에서는 딸아이를 위해 스스로 누명을 뒤집어쓰는 아빠(류승룡)가 등장한다. 그 누명은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파괴하는 자살 행위와 다름이 없었다. 만약 그 아빠가 살아 있다면, 아마도 예승이에 대한 집착이 대단했을 것이고, 그것은 부성애로 합리화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승이가 불치병에 걸렸다면 범죄를 저질러서 치료를 마련하는 내용이 전면에 등장하겠다.


영화 <7번방의 선물> 한 장면. 

우리사회는 자식을 위하는 이런 행위들에 대해서 매우 긍휼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집착증이거나 강박증에 가까울 수 있다. 당연히 사람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노력과 에너지가 들어간 대상에 대해서는 강한 소유욕과 미련의식을 가지고 있다. 자신이 고통과 희생을 통해서 부여한 존재는 바로 이러한 맥락 안에서 정신병적인 행위로 범죄와 연결될 수도 있다. 또한 자식들의 자유를 박탈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는 고부간의 갈등이라는 형태로 얼마든지 나타난다. 

한국 드라마 가운데 수없이 등장하는 이런 갈등구조는 막장으로 치닫는데 그 원인이 바로 이러한 부성애와 모성애의 강조에 있다. 그것은 종이 한 장의 차이이며 그것을 강조할수록 다른 가족의 구성원을 해치게 된다, 아내나 며느리는 결국 다른 집 딸이 아닌가. 자식을 위해서라면 남의 자식을 납치하고, 남의 집 돈을 훔치고, 뒷돈을 받는 행위들에는 바로 좋은 아빠, 좋은 엄마 그리고 부성애와 모성애라는 사회적 평가가 작동하고 있다. 그러한 점들이 (의학기술은 한 예에 불과하며)사회의 전체적인 갈등을 깊게 하고 전체 비용을 증가시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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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09685#csidx33994c1bdd5a44daa2425a27ca25fbb